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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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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과 '진짜' 이순신 장군

  • 3669
  • 2014-08-13

1,500만 관객을 넘어 최고의 흥행 기록을 만들고 있는 영화 명량은 임진왜란 개전 2년 후 정전을 했다가 다시 3년 만에 왜놈들이 재침한 정유재란 초기에 있었던 명량대첩을 소재화 한 영화이다. 영화 배경속의 시간은 이순신 장군의 스팩타클(spectacle)한 인생 중 극히 짧은 기간을 다루고 있다. 나는 영화가 보여주는 화면의 속의 화려함보다 이충무공이 우리들에게 전하는 진짜 메시지를 더 강하게 느꼈으면 하는 마음으로 내가 알고 있는 사실 몇 가지와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웅 이순신에 대한 큰 기대를 안고 명량을 관람하지만 대부분 머리 속에 있는 나만의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추상적인 모습을 현대의 미디어 기술로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평상시 이순신 장군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에 대한 영화가 나온다고 해서 많은 기대를 하고 관람을 했으나 기대했던 위인의 진중함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충무공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다소 느낄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강한 긍정의 에너지를 받을 수 있어서 나름 좋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평상시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이고 남들보다 깊은 관심을 통해 조금 더 시대적인 배경을 알고 있었기에 몇몇 장면들과 스토리는 다소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다. 명량해전 당일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난중일기와 영화 명량의 장면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또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집안은 명문 가문의 자손으로 어려서부터 인문학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던 성장 과정을 가지고 있다. 당시 명문가만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성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어린이 위인전에는 매우 가난한 집의 자손이라 어머니가 삭바느질을 해서 키웠다는 식으로 되어 있는 데 문언을 보면 증조할아버지 대에 조정에서 고위 명문 가문을 일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이순신의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관직에 올라 활동하 않아도 가문을 이끌 수 있었던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런 왜곡된 위인전이 나온 것은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어려운 집에서 큰 위인이 나올 수 있다는 스토리로 어려운 환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고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이런 사실 왜곡보다는 올바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나라를 구하는 위인이 될 수 있었다고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해군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사실은 순천향대학의 이순신 연구소 소장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당시, 조선의 해군력은 현재 대한민국의 해군력보다 뛰어났지 절대 못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선의 판옥선은 삼국시대부터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우리 한반도의 바다에 최적화된 함선이었으며 화포로 무장한 매우 강력한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수백년 동안 우리의 조상을 괴롭힌 왜놈들에게 최적화되어 발전한 것도 큰 장점이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원균의 리더쉽의 부재와 정치적인 영향으로 일본에 대패를 당했으나 명량대첩에서 330여척의 왜놈들의 전함을 12척의 판옥선으로 막았을 정도로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명량해전을 치룬 단일 이순신 장군이 직접 기록한 난중일기를 보면 그 날의 심경과 정황을 잘 이해할 수 있어 난중일기 완역본 (노승석 옮김) 에서 발췌해 보았다.

1597년 9월16일 (甲辰).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別望軍)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지(陣地)를 향해 온다."고 했다.   

곧바로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삼십여 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두 마장 밖에 있었다. 나는 노를 급히 저어 앞으로 돌진하며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의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 대니, 탄환이 나가는 것이 바람과 우레처럼 맹렬하였다.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이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 대니, 적의 무리가 저항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장차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온 배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질려 있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말고 더욱 심력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가 있고,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려 하니 적들이 물러간 것을 틈타 더 대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게 하고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세우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에 가까이 왔는데,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이르렀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부르며 말하기를,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서 살 것이냐?"고 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을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중군장이 되어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형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해주마."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먼저 교전하고 있을 때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령하니, 한꺼번에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 붙어서 기어가며 다투어 올라갔다.   

이에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각기 죽을 힘을 다해서 혹 몽둥이를 들거나 혹 긴 창을 잡거나 혹 수마석(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난격하였다. 배 위의 군사들이 거의 기운이 다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 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잇달아 와서 협력하여 적을 쏘아 죽이니 한 놈도 살아남지 못했다. 

항복한 왜인 준사(俊沙)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옥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무상(無上)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뱃머리에 올리게 하니, 준사가 날뛰면서 "이자가 마다시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로 시체를 토막내라고 명령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나아가 각기 지자, 현자 총통을 쏘니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어 서른 한 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서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의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살이 매우 험하고 바람도 역풍으로 불며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천행(天幸)이었다.

세계 4대 해전으로 알려진 불가사의한 명량해전에서 목숨을 버릴 마음으로 전쟁을 치룬 직후 난중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는 사실이 정말 대단하다. 만약 이 글이 없었다면 명량해전은 아마 구전과 왜놈들의 왜곡된 기록에 의존하지 않았을까? 임진왜란 동안 기록 된 난중일기는 총 8권인었는데 한권이 언젠가 분실되어 현재 7권만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중의 이순신 장군의 생각과 생생한 전쟁의 기록이 고스란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피나는 노력 때문이다. 평상시에도 쓰기 어려운 일기를 어찌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성실히 적을 수 있었을까? 역시, 미래를 내다보는 진정한 위인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조선의 장군이었으나 선조의 시기 등으로 그의 명성은 그리 화려하게 전해 오지 못했었고 숙종 임금이 현충사를 지으며 그의 위대함을 기리려 노력을 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이 현충사를 개보수하여 성역화하며 이충무공의 위대함을 후손에세 적극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현충사는 절이 아니라 이충무공을 모시는 사당이다. 일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현충사를 절로 알고 석가탄신일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다고 한다. 현충사 입구에는 정려가 있는데 이충무공과 그의 자손 5명의 위대한 공적을 적어 놓은 공적 안내판 같은 것이다. 잘 기억은 안나지만 그의 많은 후손들도 조국을 위해 큰 업적을 쌓았고 널리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현충사에는 충무공이순신 기념관이 있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영화에서 여러 번 보여 주던 문구가 적힌 칼이 바로 박물관에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라 적혀 있으며 뜻은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는 것이다.  또한 국보인 난중일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다행이도 자랑스런 위인의 스토리와 유물 그리고 아름다운 조경을 가진 곳으로 잘 관리되고 있다. 가족과 연인과 함께 가볼 것을 추천한다. 

이순신 장군은 율곡 이이와 덕수 이씨(德水 李氏)로 같은 시대에 조선의 안위를 위해 무신과 문신으로 역사의 큰 획을 그은 명문 혈통을 가지고 있다. 이충무공의 묘는 현충사가 아닌 아산 인근에 있는 선산에 안장되어 있다. 얼마전 신문에서 이충무공 가문의 며느리들이 일제시대까지도 국가를 위해 헌신해 왔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충무공 집안만의 훈계를 정리한 직중록이라는 책이 있고 집안의 여성들까지도 훈계를 실천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진정 국가를 위해 헌신한 최고의 가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이순신 장군의 직계 혈통은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의 강력한 리더쉽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나는 철저한 준비정신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본인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실전처럼 군사훈련을 수행했으며 그로 인해 사기가 넘치는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판옥선을 개량하여 독자적으로 개발한 거북선이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하루 전날에 전투훈련을 마쳤다는 기록을 봐도 알 수 있다. 남이 보던 안보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준비를 했기 때문에 그 만의 강력한 리더쉽을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리더는 말이 아니라 목표를 향한 진중한 실행과 월등한 결과로 깊은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위대함을 영화 속의 장면으로만 기억해서는 안된다. 그가 목숨을 바쳐 후손들에게 전해 준 긍정의 에너지와 지혜를 마음속으로 느낄 수 있어야 진정으로 영웅을 이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내가 생각하는 어려움과 상황이 과연 당시 명량해전의 말도 안되는 상황과 과연 비교조차 할 수 있을까?

이순신 장군은 우리 민족의 후손들에게 치열하게 준비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불멸의 진리를 선물로 주셨다.  


2014년 8월 21일

(주)맑음
오창록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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